1998년 개봉한 피터 위어 감독의 《트루먼 쇼》는 한 남자의 전 생애를 30년간 전 세계에 무단 생중계한 리얼리티 쇼라는 설정 하나로 관객의 뒤통수를 가격합니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저는 스크린 속 트루먼이 아니라 제 자신이 문득 무대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불쾌한 기시감을 느꼈습니다.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일상의 테두리 안에서, 과연 저는 제 의지로 선택한 삶을 살고 있었던 걸까요. 실존적 각성 — 트루먼은 왜 30년 만에 의심하기 시작했을까영화가 시작되면 트루먼 버뱅크의 하루는 놀랍도록 반듯합니다. 같은 시간, 같은 이웃, 같은 인사말. 그런데 하늘에서 조명 장치가 하나 뚝 떨어집니다. 그 순간부터 그의 세계에 균열이 생깁니다.여기서 주목할 개념이 있습니다. 바로 인지 부조화(Cognitive..
복수를 꿈꾸다가 문득, 내가 쫓던 괴물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있습니다. 2023년 개봉 후 넷플릭스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는 김재훈 감독의 《악마들》을 보면서 제가 느낀 감각이 정확히 그것이었습니다. 강력계 형사와 연쇄 살인마의 몸이 뒤바뀐다는 설정 하나로, 이 영화는 복수와 정의, 그리고 인간의 파멸을 동시에 파고듭니다. 바디체인지 설정이 건드린 것솔직히 처음엔 반신반의했습니다. 바디체인지(Body Change), 즉 두 인물의 육체와 영혼이 맞바뀌는 장치는 한국 영화에서 주로 코미디 포맷에 소비되어 온 소재였으니까요. 쉽게 말해 이 설정은 대부분 웃음을 유도하기 위한 도구였는데, 《악마들》은 그 익숙한 문법을 완전히 뒤집습니다.강력 형사 최재완은 전과 18범 연쇄 살인마 차진혁을..
2019년 개봉한 영화 《언니》는 실화를 기반으로 한 작품입니다.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 출신 여성이 납치된 지적장애인 동생을 구하기 위해 일진, 조폭, 부패 권력자를 차례로 응징하는 이야기인데, 처음 이 설정을 들었을 때 솔직히 B급 오락물이겠거니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 그 예상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습니다. 공적 시스템의 실패, 그리고 분노의 출발점영화가 가장 먼저 건드리는 것은 액션이 아닙니다. 지적장애인 동생이 실종되었는데 경찰은 "가출 여부 확인부터 하시고, 서류 작성하시고, 그다음에 신고하시면 움직일 수 있습니다"라고 응대합니다. 담임교사 역시 "학생 때 하루 이틀 가출 안 해본 사람 없다"라며 고개를 돌립니다. 제가 이 장면을 보면서 가장 먼저 느낀 건 분노보다는, 이상하리..
영화관에서 펑펑 울고 나온 날이 있었습니다. 예고편만 보고 가벼운 코미디겠거니 했던 2010년작 《헬로우 고스트》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20분, 김밥 속 미나리 한 줄기가 화면에 잡히는 순간, 제가 직접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고 그 직후부터 끝까지 걷잡을 수 없이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이 귀신을 보게 된다"는 단순한 설정 속에, 한국 영화 역사상 손꼽히는 반전 플롯이 숨어 있었습니다.반전 엔딩 — 복선이 한꺼번에 터지는 순간영화의 주인공 상만은 가족도, 연인도, 기댈 사람 하나 없이 살아온 중년 남성입니다. 삶의 의지를 완전히 잃은 그가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면서 대신 귀신 넷을 몸에 달고 살게 됩니다. 변태 할아버지, 울보 아줌마, 골초 아저씨, 초등학생 귀신. 얼핏 보..
명절 연휴에 온 가족이 모인 거실에서 틀 만한 영화를 찾다가 결국 아무것도 고르지 못하고 넷플릭스 화면만 들여다본 적이 있습니다. 그날 우연히 다시 꺼내 든 것이 2014년작 《수상한 그녀》였는데, 처음 봤을 때보다 오히려 더 많이 울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보이는 게 달라진 것인지, 할머니 말순이라는 인물이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읽혔습니다.회춘 판타지 뒤에 숨겨진 진짜 서사《수상한 그녀》는 70대 노인 오말순이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한 장으로 20대의 몸으로 돌아간다는 설정으로 시작합니다. 회춘 판타지(rejuvenation fantasy)란 노화나 상실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 두려움을 뒤집어 희망으로 치환하는 서사 장치입니다. 쉽게 말해, "내가 다시 젊어진다면"이라는 질문을 스크린 위에서 실험해 보..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볼 때까지 1997년 외환위기가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전부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정작 판을 짠 사람들은 끝까지 제 몫을 챙겼다는 사실이 너무 선명하게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2018년 개봉한 최국희 감독의 《국가부도의 날》은 단순한 경제 드라마가 아니었습니다. 그때 진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 IMF와 외환보유고 붕괴의 실체영화가 시작하면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이 브리핑 자료를 손에 쥐고 경제부처 실무자들 앞에 섭니다. 외환보유고(Foreign Exchange Reserve)가 90억 달러 아래로 떨어지면 수출입 결제를 정부가 보증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여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