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총격전을 기대하고 틀었다가, 첫 10분 만에 이 영화가 전혀 다른 결의 작품임을 직감했습니다. 2010년 개봉한 안톤 코르빈 감독의 《아메리칸(The American)》은 조지 클루니가 연기한 킬러 잭의 마지막 임무와 구원에 대한 질문을 이탈리아 산악 소도시의 냉랭한 풍경 속에 조용히 녹여낸 작품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가슴을 서늘하게 찌르고 들어온 건 폭발 장면이 아니라 사랑했던 연인을 뒤돌아보지 않고 쏴야 했던 한 남자의 메마른 눈빛이었습니다.살인을 직업으로 삼은 남자의 고독 — 잭은 왜 혼자일 수밖에 없었을까살아가면서 누군가를 믿었다가 마음이 찢어진 경험, 한 번쯤은 있지 않으신가요? 잭에게 그 '믿음'은 사치가 아니라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스웨덴 달라르나의..
1998년 개봉한 피터 위어 감독의 《트루먼 쇼》는 한 남자의 전 생애를 30년간 전 세계에 무단 생중계한 리얼리티 쇼라는 설정 하나로 관객의 뒤통수를 가격합니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저는 스크린 속 트루먼이 아니라 제 자신이 문득 무대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불쾌한 기시감을 느꼈습니다.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일상의 테두리 안에서, 과연 저는 제 의지로 선택한 삶을 살고 있었던 걸까요. 실존적 각성 — 트루먼은 왜 30년 만에 의심하기 시작했을까영화가 시작되면 트루먼 버뱅크의 하루는 놀랍도록 반듯합니다. 같은 시간, 같은 이웃, 같은 인사말. 그런데 하늘에서 조명 장치가 하나 뚝 떨어집니다. 그 순간부터 그의 세계에 균열이 생깁니다.여기서 주목할 개념이 있습니다. 바로 인지 부조화(Cognitive..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볼 때까지 1997년 외환위기가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전부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정작 판을 짠 사람들은 끝까지 제 몫을 챙겼다는 사실이 너무 선명하게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2018년 개봉한 최국희 감독의 《국가부도의 날》은 단순한 경제 드라마가 아니었습니다. 그때 진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 IMF와 외환보유고 붕괴의 실체영화가 시작하면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이 브리핑 자료를 손에 쥐고 경제부처 실무자들 앞에 섭니다. 외환보유고(Foreign Exchange Reserve)가 90억 달러 아래로 떨어지면 수출입 결제를 정부가 보증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여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