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을 나오면서 한동안 자리를 못 뜬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세어보면,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 앞에서 그런 경험이 제일 많았습니다. 이번 《오디세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단순한 신화 재현이 아니라, 영웅의 찬사 뒤에 가려진 한 인간의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문명 붕괴의 역사를 동시에 담아낸 작품이었습니다. 보고 나서 이 영화를 그냥 흘려보낼 수 없어서, 제가 직접 역사적 배경을 파고들며 정리해 봤습니다. 영웅의 이면 — 오디세우스는 정말 승리자였을까고등학교 때 세계문학 시간에 《오디세이》를 배우면서, 저는 오디세우스를 한 번도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트로이 목마를 고안한 지략가,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를 눈 하나로 물리친 영..
영화를 보다가 "이건 귀신보다 무섭다"는 생각이 든 적 있으신가요? 저는 2025년 개봉한 영화 《침범》을 리뷰 영상으로 접하면서 딱 그 감각을 느꼈습니다. 일곱 살 딸이 선천적 사이코패스라는 설정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지는데, 20년이 흐른 뒤 펼쳐지는 가스라이팅 스릴러까지 이어지면서 내내 손에 땀을 쥐었습니다. 한국 스릴러 장르에서 보기 드문 방식으로 인간의 순수한 악(惡)을 다룬 작품입니다.사이코패스 자녀와 무너지는 모성 — 전반부의 공포혹시 "사이코패스(Psychopathy)"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연쇄살인마의 이미지만 떠올리셨나요?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런데 《침범》의 전반부는 그 선입견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사이코패스란 공감 능력이 선천적으로 결여되고 충동 조절이 불가능한 반사회적 인격 장..
"돈이 다가 아니다"라는 교훈을 받고도, 주인공이 부자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버티면 어떻게 될까요? 2026년 개봉작 《굿 포츈(Good Fortune)》은 바로 그 발칙한 질문을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제가 리뷰 영상을 보자마자 피식 웃으면서도 가슴 한쪽이 무거워졌던 이유, 지금부터 솔직하게 풀어보겠습니다.긱 이코노미의 민낯, 차 안에서 자는 주인공이 낯설지 않은 이유영화 도입부에서 주인공 아지는 아침엔 배달 알바, 오후엔 마트 알바를 뛰며 하루를 보냅니다. 그래도 월세를 감당할 수 없어 차 안에서 잠을 청하는 신세죠. 이 설정을 처음 봤을 때 제가 느낀 건 "저러다 어떻게 되나"가 아니라 "저거 실제로 많다"는 감각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건 아니지만, 주변에서 이른바 '긱 워커(Gig Work..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계유정난이라는 거대한 정치 드라마 대신, 영월 청령포에서 보낸 단종의 마지막 4개월을 들여다본다는 설정 자체가 제게는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장항준 감독의 신작 《왕과 사는 남자》는 왕위 쟁탈전이 아니라, 권력을 잃은 한 인간이 밥 한 끼를 나누며 비로소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박지훈이 연기한 단종 '이홍'과 유해진이 연기한 광천골 촌장 '엄흥도'의 관계가 남긴 잔상은 영화관을 나온 뒤에도 한참 동안 가시질 않았습니다. 팩션사극이 선택한 시선 — 권력의 중심이 아닌 변방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왜 지금까지 이 각도로 접근한 작품이 없었을까"였습니다. 단종을 다룬 콘..
요즘 무협 영화를 틀면 십중팔구 하늘을 나는 장면과 눈이 피로해지는 CG 폭풍이 쏟아집니다. 저도 그게 당연한 줄 알고 몇 년째 정통 무협에 대한 기대를 접고 살았는데, 2026년 신작 《검객 생과사》를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칼과 칼이 실제로 부딪히는 그 무게감,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그 맛이 스크린에 고스란히 살아 있었습니다. 취도객이라는 캐릭터, 기대보다 훨씬 강렬했습니다일반적으로 '술에 취한 검객' 하면 코믹한 분위기의 조역 정도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 영화의 주인공 취도객(醉刀客)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여기서 취도(醉刀)란 술에 취한 것처럼 흐느적거리는 몸의 움직임 속에 찰나의 순간 상대의 급소를 꿰뚫는 검술 초식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
장례식장에 다녀오면 정말 부정이 탈까요? 저는 오랫동안 이걸 그냥 어르신들의 낡은 미신이라고 흘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영화 《세이레》를 보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갓 태어난 아이를 둔 삼칠일 기간에 금기를 어긴 한 남자의 이야기가 단순한 귀신 영화가 아니라, 제가 직접 겪어본 일상의 불안과 죄책감을 그대로 건드려왔기 때문입니다. 삼칠일, 우리가 잊고 있던 금기의 무게솔직히 처음에는 '설마 이걸 2020년대 영화 소재로 쓴다고?' 싶었습니다. 삼칠일이라는 개념 자체가 요즘 세대에겐 생경하니까요. 삼칠일(三七日)이란 출산 후 21일간 신생아와 산모를 외부로부터 격리하는 전통 육아 금기입니다. 쉽게 말해 면역력이 거의 없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히 막고, 집안에 부정한 기운이 들어오지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