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살인마를 잡아놓고도 증거 부족으로 풀어줄 수밖에 없는 장면, 보고 계십니까? 2011년 개봉한 엘리엇 레스터 감독의 《블리츠(Blitz)》가 딱 그 순간을 정면으로 건드립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한동안 말이 안 나왔습니다. 법이 보호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법의 허점을 이용하는 쪽을 지켜주는 광경이 너무도 낯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네오누아르 장르가 런던 잿빛 거리와 만났을 때《블리츠》는 아일랜드 작가 켄 브루언의 하드보일드 범죄 소설을 원작으로 합니다. 여기서 하드보일드(Hard-boiled)란, 감상적인 영웅주의 대신 냉혹한 현실과 도덕적 회색지대를 날것 그대로 묘사하는 범죄 소설·영화의 장르적 문법을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 선이 악을 깔끔하게 이기는 이야기가 아니라 선과 악의 경계 자..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프랑스 원작 《언터처블: 1%의 우정》을 이미 본 터라 할리우드 리메이크라는 말에 반신반의하며 틀었는데, 브라이언 크랜스톤과 케빈 하트가 만들어낸 케미스트리(chemistry)는 원작의 그늘을 충분히 지워낼 만큼 강렬했습니다. 전신마비 억만장자와 전과자 백수가 뉴욕 펜트하우스에서 충돌하며 서로의 결핍을 채워가는 이야기, 《디 업사이드(The Upside, 2019)》입니다. 편견 없는 우정이 만들어낸 케미스트리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제 조건이나 과거의 실패 때문에 세상 모든 사람이 저를 지레짐작하고 한계를 규정짓던 어느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딱 한 사람이 아무런 동정 없이 그냥 한 인간으로 눈을 맞춰줬는데, 그 순간 닫혀 있던 마음이 무너지듯 열렸던..
극장 불이 꺼지고 화면이 밝아오던 순간, 저는 이게 단순한 영화 관람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습니다. 2008년 아이언맨을 처음 봤던 그 스무 살의 기억부터 지금까지, 11년치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경험이었습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22번째 작품이자 인피니티 사가의 대단원으로, 역대 최고 오프닝 기록을 세우며 대중문화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시대의 절정 — 11년이 한 편에 담기는 감각영화관을 나오면서 제가 처음 내뱉은 말은 "아, 진짜 끝났구나"였습니다.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토르. 이 세 캐릭터는 각각 3편의 솔로 영화를 이끌며 MCU라는 거대한 서사 구조의 기둥 역할을 해 왔습니다. 그 무게를 체감한 건 극장 안에서가 아니라, 밖으로 나와 찬 바람을 맞..
앞선 세대가 저질러 놓은 잘못의 대가를 고스란히 짊어진 채 살아간 적 있으신지요. 저는 《블랙 팬서》를 보는 내내 그 묵직한 감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2018년 라이언 쿠글러 감독이 연출한 이 작품은 MCU 최초로 흑인 슈퍼히어로를 주연에 세우고, 아프리카 전통문화와 SF 테크놀로지를 하나의 스크린 위에서 완벽하게 녹여낸 기념비적인 영화입니다. 아프로퓨처리즘이 스크린을 채우는 방식《블랙 팬서》를 처음 극장에서 봤을 때, 제가 가장 먼저 받은 인상은 "이건 그냥 슈퍼히어로 영화가 아니다"라는 감각이었습니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화면 가득 채우는 색감과 음악이 심상치 않았거든요.이 영화의 핵심 미학 언어는 아프로퓨처리즘(Afrofuturism)입니다. 여기서 아프로퓨처리즘이란 아프리카의 전통문화·역사·정..
솔직히 저는 《스파이더맨: 홈커밍》을 보기 전까지, 또 한 번의 거미줄 기원 이야기를 반복해서 봐야 한다는 생각에 반쯤 지쳐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극장에서 불이 꺼지고 나서, 이 영화가 제 안의 오래된 감정을 건드리는 데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콘크리트 잔해 아래서 눈물범벅이 된 채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열여섯 살 피터 파커의 얼굴이, 왜 그렇게 낯설지 않았는지 그때는 한동안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장 서사 : 리부트라는 선택, 그리고 영리한 생략2017년 개봉한 존 왓츠 감독의 《스파이더맨: 홈커밍》은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즉 마블 스튜디오가 구축해 온 공유 영화 세계관에 스파이더맨이 공식 합류한 첫 단독 작품입니다. 소니 픽처스와의 판권 공유 계약이라는 복잡한 배경 속에..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슈퍼히어로 액션 블록버스터를 보러 들어갔다가, 극장을 나오면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으니까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 2》(2017, 제임스 건 감독)는 화려한 우주 전투보다 캐릭터 한 명 한 명의 내면을 파고드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씁니다. 그 선택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동시에 묵직하게 울리기도 했습니다.캐릭터 드라마에 방점을 찍은 속편의 선택저도 처음엔 전편과 같은 종류의 흥분을 기대했습니다. 1편의 도입부, 그러니까 피터 퀼의 사연에서 시작해 모락 행성까지 이어지던 그 완벽한 오프닝 시퀀스는 제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전체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거든요. 그런데 2편은 그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습니다.이번 오프닝은 베이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