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암살》을 처음 봤을 때 그냥 잘 만든 액션 블록버스터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한테서 잊혀지겠죠. 그럼 알려줘야지. 우리는 계속 싸우고 있다고." 단 두 마디가 가슴에 박혀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2015년 개봉한 최동훈 감독의 이 영화가 천만 관객을 넘긴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케이퍼 무비 문법으로 되살린 1933년의 경성《암살》은 장르적으로 케이퍼 무비(Caper Movie)의 구조를 정확히 따릅니다. 케이퍼 무비란 치밀하게 짜인 작전 계획과 그 실행 과정에서 터지는 돌발 변수를 긴장감 있게 보여주는 범죄·첩보 장르입니다. 쉽게 말해 "팀을 꾸리고, 계획을 세우고, 결행한다"는 공식이 핵심인데, 최동훈 감독은 이..
2019년 개봉한 박누리 감독의 영화 《돈》은 불법 공매도와 차명 계좌를 이용한 작전세력의 주가 조작을 소재로 한 금융 범죄 스릴러입니다. 처음 이 영화를 보면서 제가 가장 먼저 느낀 건 낯선 충격이 아니라, 불편할 정도로 익숙한 감각이었습니다. 평범한 흙수저가 '이 정도쯤이야'라며 선을 넘기 시작하는 그 지점이 너무 현실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욕망: 흙수저 브로커가 선을 넘기까지주인공 조일현은 여의도 증권사에서 주문을 체결하고 수수료를 받는 주식 브로커로 사회생활을 시작합니다. 여기서 주식 브로커란, 고객의 매매 주문을 증권 시장에 넣고 체결시키는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직접 투자 판단을 내리는 펀드매니저와는 구별됩니다. 단순한 중개 역할이지만 수수료가 누적되면 꽤 짭짤하고, 반대로 실수 한 번이면 자리..
솔직히 처음 인터스텔라를 봤을 때, 저는 블랙홀이나 상대성이론 같은 과학 개념보다 쿠퍼가 영상 편지를 보며 오열하는 장면에서 먼저 무너졌습니다. 2014년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이 작품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킵 손의 자문을 바탕으로, 하드 SF의 냉철한 논리와 딸바보 아버지의 뜨거운 감정을 한 화면에 담아낸 보기 드문 영화입니다. 국내에서는 인구 대비 독보적인 흥행을 기록했는데, 저도 그 숫자 중 하나였습니다. 제작비화 — 옥수수밭부터 파이프오르간까지인터스텔라의 시작이 소개팅이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1980년 뉴욕타임스 매거진의 편집자 린다 옵스트와 이론물리학자 킵 손이 소개팅으로 처음 만났고, 연인이 아닌 친구로 남은 두 사람이 25년 뒤 "진짜 과학을 담은 블록버스터를 만들자"며 손을..
2024년 개봉한 장재현 감독의 《파묘》는 국내 누적 관객 1,200만 명을 돌파한 한국 오컬트 영화입니다. 제가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든 감각은 공포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밟고 살아가는 이 땅 아래에 무엇이 묻혀 있는가"라는 서늘한 물음이었습니다.친일파 조상 묫바람 — 가문을 짓누른 첫 번째 저주영화는 미국 LA에 거주하는 재력가 박지용의 가문에서 태어난 아기가 울음을 멈추지 않는 기이한 증상을 보이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의학적으로 아무런 이상이 발견되지 않자, 무당 화림과 법사 봉길이 바다를 건너 의뢰를 받습니다.화림은 가문의 사진을 살피다 대를 이어 똑같은 악령의 흔적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포착하고 즉각 진단을 내립니다. 바로 묫바람입니다. 여기서 묫바람이란 조상의 묘소..
조선왕조실록 중종 22년에 실제로 기록된 '궁궐에 나타난 기이한 짐승'이라는 팩트 위에 크리처물 장르를 얹은 영화가 있습니다. 2018년 개봉한 허종호 감독의 《물괴》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괴수 액션보다 권력 암투 쪽에서 훨씬 더 강한 인상을 받았고, 보고 난 후에도 한참 그 찜찜함이 남아 있었습니다. 권력 암투: 괴물보다 무서운 건 사람이었습니다《물괴》의 구조는 단순한 괴수 영화와 다릅니다. 영화 중반부까지는 물괴가 실제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훈구파 영의정이 왕권을 흔들기 위해 퍼뜨린 정치적 조작인가를 두고 팽팽한 심리전이 펼쳐집니다. 여기서 팩션(Faction)이라는 개념이 중요한데, 이는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결합한 장르 방식으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더해 서사..
아내를 지키려던 남자가 정작 아내에게 배신당했다면, 그 남자는 과연 무엇을 위해 싸운 걸까요. 2009년 개봉한 윤재구 감독의 《시크릿》을 처음 봤을 때, 제가 느낀 건 단순한 스릴러의 긴장감이 아니었습니다. 비밀을 덮으려다 더 깊은 함정으로 빠져드는 한 형사의 처절한 몸부림을 지켜보며, 어느 순간 가슴 한편이 서늘하게 내려앉는 기분을 받았습니다. 플롯 트위스트가 설계한 덫, 형사의 딜레마《시크릿》의 핵심 구조는 형사가 살인 현장에서 자기 아내의 증거를 은폐해야 한다는 딜레마에서 출발합니다. 여기서 '딜레마(dilemma)'란 두 선택지 모두 파국으로 이어지는 상황, 즉 덮어도 지고 드러내도 지는 구조를 말합니다. 이 설정 하나가 영화 전체를 떠받치는 힘입니다.주인공 김성열 형사는 살인 사건 현장에서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