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넷플릭스 글로벌 1위라는 타이틀에 반신반의하며 틀었는데, 107분 내내 한 번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2023년 개봉한 장 프랑수아 리셰 감독의 《플레인(Plane)》은 항공 재난의 서스펜스와 정글 한복판의 인질 구출 액션을 하나로 엮어낸 웰메이드 미드버짓(Mid-budget) 액션 스릴러입니다. 화려한 CGI도, 복잡한 세계관도 없이 기장 한 명의 직업적 책임감 하나로 러닝타임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영화입니다. 리더의 책임감 — 덜덜 떨면서도 제자리를 지켜야 했던 순간들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가슴을 파고든 건 스토리가 아니었습니다. 기장 브로디 토런스가 폭풍우 속에서 전력이 끊긴 여객기를 맨손으로 통제하던 그 장면에서, 갑자기 제 기억 속 어느 순간이..
가장 믿었던 사람이 나를 나락으로 밀어 넣는다면, 그 순간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요. 영화 《타짜: 벨제붑의 노래》를 보면서 제가 처음 든 생각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배신, 포커 확률, 그리고 바닥에서부터 시작되는 역전극.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타짜 시리즈 특유의 찰진 맛이 현대적인 포커판 위에서 이렇게 잘 살아날 줄은 몰랐거든요.배신의 구조: 열등감이 만들어낸 범죄장태영(변요한)이라는 남자는 태어날 때부터 운이 좋았습니다. 지각을 해도 선생님이 출석을 안 부르고, 마른하늘에 비를 맞아도 자기만 빠져나가는 식이었죠. 창업 후에는 손대는 사업마다 터졌고, 8년 만에 매출 1천억을 돌파했습니다.문제는 그 옆에 박태영(노상현)이 있었다는 겁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서늘하게 와닿은 ..
경찰이 살인마를 잡아놓고도 증거 부족으로 풀어줄 수밖에 없는 장면, 보고 계십니까? 2011년 개봉한 엘리엇 레스터 감독의 《블리츠(Blitz)》가 딱 그 순간을 정면으로 건드립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한동안 말이 안 나왔습니다. 법이 보호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법의 허점을 이용하는 쪽을 지켜주는 광경이 너무도 낯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네오누아르 장르가 런던 잿빛 거리와 만났을 때《블리츠》는 아일랜드 작가 켄 브루언의 하드보일드 범죄 소설을 원작으로 합니다. 여기서 하드보일드(Hard-boiled)란, 감상적인 영웅주의 대신 냉혹한 현실과 도덕적 회색지대를 날것 그대로 묘사하는 범죄 소설·영화의 장르적 문법을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 선이 악을 깔끔하게 이기는 이야기가 아니라 선과 악의 경계 자..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프랑스 원작 《언터처블: 1%의 우정》을 이미 본 터라 할리우드 리메이크라는 말에 반신반의하며 틀었는데, 브라이언 크랜스톤과 케빈 하트가 만들어낸 케미스트리(chemistry)는 원작의 그늘을 충분히 지워낼 만큼 강렬했습니다. 전신마비 억만장자와 전과자 백수가 뉴욕 펜트하우스에서 충돌하며 서로의 결핍을 채워가는 이야기, 《디 업사이드(The Upside, 2019)》입니다. 편견 없는 우정이 만들어낸 케미스트리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제 조건이나 과거의 실패 때문에 세상 모든 사람이 저를 지레짐작하고 한계를 규정짓던 어느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딱 한 사람이 아무런 동정 없이 그냥 한 인간으로 눈을 맞춰줬는데, 그 순간 닫혀 있던 마음이 무너지듯 열렸던..
아이가 살인 용의자로 몰렸을 때, 부모는 과연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요. 영화 《비광》은 그 질문을 정면으로 들이밉니다. 《미쓰백》으로 평단과 관객을 동시에 사로잡았던 이지원 감독의 신작으로, 오는 9월 2일 개봉 예정입니다. 예고편을 처음 봤을 때 저는 중간도 아닌 딱 첫 장면에서 숨이 막혔습니다. 그 감각이 가시기도 전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부성애는 왜 가장 무서운 감정일까요영화 속 황중구는 한때 KBO 4번 타자였습니다. 4번 타자란 팀에서 가장 강한 타격 능력을 가진 주전 선수에게 붙이는 포지션으로, 쉽게 말해 그 팀의 얼굴이자 중심축 같은 자리입니다. 그런 사람이 3류 건달로 추락해 경찰서를 제 집 드나들듯 하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설정 자체가 이미 하나의 비극 서사입니다.그런데 제가 ..
극장 불이 꺼지고 화면이 밝아오던 순간, 저는 이게 단순한 영화 관람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습니다. 2008년 아이언맨을 처음 봤던 그 스무 살의 기억부터 지금까지, 11년치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경험이었습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22번째 작품이자 인피니티 사가의 대단원으로, 역대 최고 오프닝 기록을 세우며 대중문화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시대의 절정 — 11년이 한 편에 담기는 감각영화관을 나오면서 제가 처음 내뱉은 말은 "아, 진짜 끝났구나"였습니다.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토르. 이 세 캐릭터는 각각 3편의 솔로 영화를 이끌며 MCU라는 거대한 서사 구조의 기둥 역할을 해 왔습니다. 그 무게를 체감한 건 극장 안에서가 아니라, 밖으로 나와 찬 바람을 맞..